박정희 전두환 매카시즘 종북몰이 정치2015. 5. 29. 16:43
1. 박정희 군부독재 용공조작사건
박정희 정권 18년간, 수많은 인권탄압사건들이 있었습니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이유로, 수많은 학생 시민들을 납치 감금하여 종북간첩으로 조작하고 처형한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차 및 2차 인민혁명당 사건
인민혁명당사건(人民革命黨 事件) 또는 인혁당사건(人革黨 事件)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에 의해 도예종 등의 인물들이 기소되어 선고 18시간 만에 날치기 사형이 집행된 용공조작사건이다.
1964년의 제1차 사건에서는 반공법, 1974년의 제2차 사건(인혁당재건위사건)에서는 국가보안법·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에 따라 기소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해,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 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대표적 인권 탄압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https://goo.gl/mKk8Vq
같은 해 8월 21일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 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배척하면서 시국사건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 민청학련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事件), 줄여서 민청학련 사건(民靑學聯事件)은 1974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된 사건을 말한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과 종교인 등이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나 시위, 유인물 배포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하여 학생들이 수업거부 등의 집단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민청학련'이라는 단체가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반체제 운동을 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1,024명이 조사를 받고 180여명이 '인민혁명당과 조총련, 일본공산당, 혁신계 좌파'의 배후조종을 받아 1973년 12월부터 전국적 민중봉기를 통해 4월 3일 정부를 전복하고 4단계 혁명을 통해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7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 12명이 징역 20년 , 6명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그 외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석방되었다
2005년 12월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는 재조사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라고 발표했다.
2009년 9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에게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30여년간 박정희 정부에 의해 왜곡되었던 민주주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열리게 되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 동백림사건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천상병 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4)이수근 간첩 조작 사건
[뉴스데스크]
● 앵커: 지난 1960년대 말 이중간첩으로 몰려 처형된 이수근 씨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동안 숱한 의혹제기가 있어오기는 했지만 40여 년이 지난 오늘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는 결정이 나왔습니다.
장미일 기자가 보도합니다.
● 기자: 지난 1967년 판문점을 통해 귀순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 씨. 당시 김일성 연설문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숙청위기에 이르자 귀순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 이수근(당시 육성): 김일성 찬양기사를 싣지 않았다는 죄로 나는 사상적인 면에서 의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조만간 숙청당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자: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 하에 있어야만 했던 이 씨의 남한생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결국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한 채 위조여권을 들고 중립국인 캄보디아로 향하다 기내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붙잡힙니다.
한국으로 압송된 이 씨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으로 몰려 처형됩니다. 이 씨가 위장 귀순을 자백했고 김일성 앞으로 보낸 비밀편지가 있었다는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잇달았습니다.
그리고 40여 년이 흐른 오늘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이 씨가 위장귀순을 자백하기까지 수많은 고문을 당했고 비밀편지는 실체가 없었다고 발표했습니다.
● 배경옥(이 씨의 처조카): 제가 직접 체험 해보니까 이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정하고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았거든요.
● 기자: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중정이 씨의 귀순을 체제우위의 상징으로 선전하다 이 씨가 해외로 탈출해 궁지에 몰리자 이중간첩으로 조작했다고 밝혔습니다.
MBC뉴스 장미일입니다.
(장미일 기자 meal@imbc.com)
(5)문인간첩단 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974년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연구소장) 등 5명이 간첩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된 문인·지식인 간첩단 사건은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가 개헌지지 운동을 막기 위하여 조작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좌에서 두번째 임헌영( 현 민족연구소장 )
진실화해위는 이날 “당시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던 보안사가 불법 수사를 은폐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것처럼 서류를 허위로 작성했다.”며 관련자에 대한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한 재심조치를 국가에 권고했다. 피해 당사자들은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다.
문인 지식인 간첩단 사건은 1973년 10월부터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와 재야인사들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부터 시작됐다.
문학계에서도 구중서, 신상웅 등을 중심으로 1974년 1월7일 문인 61인의 개헌지지 성명이 발표됐다.
이에 보안사는 지지성명에 직접 서명하고 일본 민단계 재일동포가 발행하는 ‘한양’지에 글을 기고한 것을 빌미로 임헌영·이호철·김우종·장병희·정을병씨에 대해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진실화해위측은 “보안사는 ‘한양’지가 반국가단체의 위장잡지라는 점을 알면서도 임씨 등이 원고를 게재하고 원고료를 받았다며 간첩죄를 적용했고 고문 등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받아냈다.”면서 “이는 박정희 정권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벌인 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검찰 조사에서 간첩 혐의가 제외됐고 임씨 등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자격정지 1년 이상과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다.
(6) 남민전사건
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말기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기록된 일이다.
1967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위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에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 등 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 84명의 조직원이 구속되었다. 공안기관은 이를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하였다.
2006년 3월,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됐다. (위키백과)
경찰청 과거사위는 경찰이 그동안 벌어진 대부분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서 피의사실을 미리 발표해 피의자의 인권과 그 가족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1979년 남민전 사건의 경우 당시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이 "북괴와 연계된 무장 간첩단 사건"이라고 3차례에 걸쳐 사건의 전말과 수사진행사항을 발표했으며, 청주대 자주대오 사건도 암호해독문 등에 대해 검찰의 공소장이나 수사기록, 법원의 판결문에 전혀 증거로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경찰이 마치 이 문건이 존재하는 것처럼 미리 언론에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민 대다수는 남민전 사건 등에 대해 대표적인 간첩단 사건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과장 발표했다고 비판했다.
2. 1970년대 국내정치상황 :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줄곧 내세운 국정의 지표는 반공과 경제성장이었다. 박정희는 반공을 명분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했고, 경제성장으로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그런데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반공과 경제성장 양쪽에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
미.중국교수립 : 한국전쟁에서 서로 총부리를 맞댔던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1972년 닉슨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거쳐 마침내 국교수립으로까지 이어졌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도 1969년부터 전략무기감축회담이 진행되어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데탕트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닉슨독트린 : 닉슨 미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독트린이라는 새로운 외교방침을 발표했다.
그것은 분쟁지역에서의 미국의 과잉개입을 억제하고, 동맹국에 자국의 방위부담을 전가하는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1970~71년 주한미군 6만 명 중 2만 명을 철수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남북대화를 강요하였다. 이런 속에서 1971년 9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었고, 1972년에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내용으로 하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진전은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고 있던 반공이데올로기를 근저로부터 흔들었다. 그리고 또한 반공을 정권안보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박정희 정권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고도성장의 그늘 아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의 분노의 절규였다.
광주이주단지민란사건 : 1971년 8월에는 서울 변두리 판잣집에서 경기도 광주 황량한 벌판으로 무작정 내몰린 사람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과중한 세금 부담에 불만을 품은 시장 상인들의 항의도 잇따랐다. 학생과 지식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1971년 대학생에 대한 교련교육 실시 방침에 반발하여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언론자유수호운동 : 1971년 4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대학 교수들이 대학자주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년 7월 7일에는 정권의 사법부 간섭에 반발하여 서울형사 민사지방법원 판사들이 전원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1971년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국면의 한 정점이었다.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이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95만 표 차이로 패배하였다.
5월 25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신민당의 선전은 놀라웠다. 신민당은 과반수에서 13석 모자란 89석을 획득하였다. 이 양대 선거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선거를 감안할 때 실제로는 야당의 승리였다.
10월유신: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는 특별선언을 통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등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박정희가 일본의 명치유신에 비교하여 10월유신이라고 부른 이 조치는 5.16에 이어 박정희에 의해 저질러진 또 다른 쿠데타였다.
유신헌법 철폐운동 :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도전은 학생들로부터 나왔다. 국민 모두가 유신의 칼날 아래 숨죽이며 살고 있던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유신헌법의 철폐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는 가운데 12월 24일에는 장준하, 백기완 등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서명운동은 시작한 지 10일 만에 30만 명이 서명할 정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유신반대운동은 종교인, 지식인, 언론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으로 번져나갔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1호 선포 :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비장의 칼 긴급조치를 꺼내들어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1호가 선포되었다. 유신헌법을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되었고, 유신헌법의 개정과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행위도 금지되었으며,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가 금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보도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하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졌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와 백기완이 최초로 구속되었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 1974년 신학기가 되자 학생들은 전국의 각 대학이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 하에 연합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하였다. 박정희는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는 것으로 맞섰다. 학생들의 배후로 인민혁명당이란 공산주의단체가 억지로 조작되었고, 많은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가을이 되면서 학생들이 동료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천주교와 기독교까지 반유신 대열에 합류하였고, 언론인, 문인들도 가세하였다. 박정희는 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반대와 비판이 금지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1975년 4월 8일 긴급조치 7호: 1975년 신학기가 되면서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화되자 박정희는 4월 8일 고려대 내에서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하였다.
김상진열사할복사건 : 그럼에도 4월 11일에는 서울대생 김상진이 유신헌법의 철폐를 요구하며 할복자살하였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 그런데 때마침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였다. 국민들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이용하여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9호의 내용은 1호와 큰 차이 없었다. 다만 형량이 1년 이상의 징역으로 조정되고, 군사법정이 아닌 일반 법정에서 재판하도록 한 것뿐이었다.
긴급조치 9호 하에서도 반유신 민주화운동은 계속되었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생들이 김상진열사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반유신 시위를 벌였다.
민주구국선언사건 :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문익환, 함세웅 등이 유신체제의 철폐를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였다가 11명이 구속되었다. 이밖에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혹은 편지를 통해 유신을 비판했다가 구속되었다.
1978년이 되면서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1978년 6월에 비록 소규모이지만 광화문에서 가두시위를 벌일 정도로 발전하였다.
새마을운동: 농촌에서는 농민을 잘살게 하겠다고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으나 허울뿐이었다.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정책이 지속되는 한 어떠한 정책도 농민을 잘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이농은 계속되었다.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에 농민을 동원하기 위한 관제 운동이었을 뿐이었다. 이러는 속에서 천주교 가톨릭농민회 등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농민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3. 독재의 말로 : ‘78 ~ ’79 남민전사건 전후의 상황전개
신민당의 승리 : 1978년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민심이 박정희를 떠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힘입어 유신에 대한 강경 도전을 주장한 김영삼이 신민당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79년 들어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이제 학생 시위는 전국 모든 대학의 일이 되었다. 나라 밖에서는 미국 대통령 카터가 인권을 문제삼아 박정희 정권에 민주화조치를 시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YH사건 : 이러는 가운데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여공들을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다가 김경숙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영삼은 대여투쟁에 더욱 강경한 자세로 나아갔고,
김영삼신민당총재제명사건: 이에 대해 박정희는 1979년 10월 4일 제1야당 총재인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하는 것으로 맞섰다. 유신세력과 반유신세력의 대규모 충돌은 이제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마항쟁: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서 시위는 파출소를 파괴하는 등 시민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이튿날인 17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시위대는 세무서, 언론사까지 공격하였다.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으나, 이번에는 이웃 도시 마산에서 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제 유신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운명의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충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것으로 유신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4. 남민전의 진실 : 남영동대공분실, 이근안팀의 작품
1978년 연말에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박정희 공화당의 득표율보다 1.1% 앞서는 결과로 귀결되고 대여투쟁에서 선명 강경노선을 고수한 김영삼의원이 중앙정보부의 집요한 방해공작을 이겨내고 신민당총재로 당선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후 급박하게 진행되는 국내정치상황은 종말적 위기감에 사로잡힌 유신독재세력들은 가능한 수단을 동원하여, 극도의 자기방어적 공안정국을 조성하게 되고, 정권말기의 살인적인 고문을 통해 용공조작사건을 날조하게 된다.
오로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국민의 의식을 세뇌하여 독재정권의 연장을 위해서........
이재오의 증언 -시월 유신하 세 번째 고문을 당하면서-
1979년 8월 6일, 오원춘 납치사건으로 한국의 천주교가 발칵 뒤집혀졌다. 그날 안동교구청이 있는 성당에서 오원춘사건 진상보고대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의 인원탄압에 대해서 보고를 해 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받고 안동에 내려갔다. 기도회는 3부까지 진행되었는데 2부에 김수환 추기경의 강론이 있고 3부에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박정권의 반민주적 인권탄압 사례들을 보고하고 즉각 하야할 것을 촉구하였다. 비극적인 종말이 오기 전에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2년 이내에 박정권은 무너질 것 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날 박정권을 강하게 몰아붙인 것은 73년 이후 두 차례나 박정권에 의해서 투옥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카농(카톨릭농민회)회원, 신부, 수녀, 신자들이 안동시청 앞까지 야간 횃불시위를 벌였다. 나는 다음날 아침 김승훈 신부와 같이 그의 차로 서울로 올라왔다.
1979년 8월 8일 엠네스티 사무실에 출근하여 책상 위를 정리하고 안동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평(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이태호 간사에게 일부 주고 일부는 보관철에 꽂고 있다가 서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연행되었다.
서부경찰서에서는 정보부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안동강연 녹음테이프가 여기 있으니 이 내용을 가지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내 연설 중 어느 대목이 긴급조치 9호 위반 내용이냐고 심하게 따지자, 좌우간 우리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니까 우리가 뭘 아느냐는 식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꾸며서 구속하였다.
그것이 박정권 하에서 내가 세 번째 투옥되는 사건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세 번째 들어가서 1사 상 21방에서 재판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1979년 추석 전날로 기억된다), 다음날이면 긴급조치재판이 시작되는데, 저녁 무렵 출정이라면서 교도관이 감방문을 열었다.
불길한 예감이 퍼뜩 들었다. 출정 전날 불려나가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보안과장실에 가니 낯선 젊은이가 두 명 와 있었다. 몇 마디 신병을 확인하고 수갑을 채워 끌려간 곳이 남영동 대공분실 이었다.
내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첫 번째 출입하게 된 것은 감방에서였다. 그러나, 대공분실에서 나를 고문한 사람들은 73년,77년, 두 번이나 나를 투옥시킨 이근안팀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두 번이나 살인적으로 고문을 당한바 있었기 때문에 우선 겁부터 났다. 내가 여기서 살아나 간다면 그것은 기적이다, 죽어나간다, 죽어나간다, 하는 공포감이 순간 전신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 다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살아서 죽느니, 죽어서 사는 사람이 되자, 그 순간부터 나는 고문을 온몸으로 받아내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신이 아니고 인간이었다. 죽기를 각오할수록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고문은 시작되었다.
남영도 대공분실, 세칭 악마들의 고향의 5층 조사실-조사실 이라기보다 고문실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물을 마음대로 먹일 수 있는 목욕탕(욕조실), 대소변을 처리하는 변기, 책상 하나, 의자 둘, 단색의 벽과 천장, 전기고문을 할 수 있는 침대, 아무리 소리쳐도 밖에 새나가지 않는 방음벽, 높은 자들이 감시 할 수 있는 TV장치…
나는 무엇 때문에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채 우선 30분가량 5~6명의 건장한 사내들로부터 무차별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얼굴이 붓고, 코피가 쏟아지고, 눈에 멍이 들고, 다리, 무릎, 팔, 가슴 할 것 없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리고 나서 너 남민전에 가입했지?”
“남민전 이라니요.”
다시 고문, “너 이재문이 알지?”
“모릅니다.”
다시 고문. 그렇게 시작된 고문은 5층에서 3층 소위 사장실이라는 넓은 방으로 옮겨 넓은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들 고문자들은 내가 아는 얼굴들이었고 고문팀의 책임자는 나를 두 번이나 투옥시킨 장본인이었다. 넓은 목욕탕에 들어갔다. 희미한 전깃불이 들어왔다. 문이라고는 출입구밖에 없고 출입구는 2중문으로 사장(?)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알몸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에 내 생식기는 대추씨 만해졌다. 두 발목을 밧줄로 묶고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역시 밧줄로 묶어서 무릎을 두 팔 사이로 넣고 굽힌 무릎 사이로 침대봉을 넣어 거꾸로 매달았다. 얼굴에 젖은 수건을 덮었다.
이제부터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이 시작되는구나. 나는 이미 겪은 경험에 따라 살아나가길 체념하고 빨리 내 의식이 사라져 주기를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게 기원했다.
“나를 빨리 거두어 주소서.”
수건으로 덮은 얼굴 위로 고춧가루를 탄 주전자 물을 붓기 시작했다.눈, 코, 입으로 들어가는 맵고 따갑고 화끈거리는 고통에 혼신의 힘으로 버둥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침대봉이 부러지고 다시 막대기가 끼워졌다.
그들은 숙련공처럼 침착했고 나는 짐승처럼 버둥거리다 지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다시 5층 조사실(?)로 올라왔다.
“남민전 가입했지?”
“나는 남민전이라는 단체는 알지도 못합니다.”
“너 이재문이 알지?”
내가 지하운동을 하면서 만난 선배는 ‘김’입니다. 시월유신하 최대의 지하조직으로 알려진 남민전의 책임자 이재문씨는 김사장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대표로 있던 지하조직은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약칭 “민투”였고 나의 조직명은 한국주였다. 민투의 조직원은 대부분 현직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그들 모두가 나와 함께 처절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의식이 돌아오면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고문이 시작되면 무조건
“예”,
“예”하고…… 그것은 짐승과 같았다.
10일간의 지옥에서 서대문구치소 1사 상 21방으로 돌아오니 천국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런 곳이 아닐까? 감옥의 감방은 비어 있는 10일간 쥐들의 자유 광장이었다.
나는 창틀사이로 보이는 하늘 한 조각을 보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다. 그 후 나는 15년을 구형받고 5년을 선고받아 복역중 83년 8월 15일 특사에 의한 형 집행정지로 출옥했다.
나는 나를 짐승으로 만든 고문자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인간성을 야수로 만든 분단 40년, 그 분단의 냉전논리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이용한 군사독재정권을 용서 할 수 없는 것이다
[ 2006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관련자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
2.전두환 종북 간첩 조작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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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의 주요 인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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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국 | 부림사건 주임 검사 (극중 : 강검사)
당시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로, 부림사건 기소를 주도. 이후 김영삼 정부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며 한보사태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전주지검장으로 재직하다 99년 대전 법조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제출하고 울산
남구에서 국회의원 당선 및 한나라당에서 3선을 한 전 국회의원이다. 부림사건에 대한 가장 최근 발언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기들 행동을 미화하려고 그러는 것. 수사 당시 부산 대공분실로 찾아가서 고문당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다. 피의자들이 '고문당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고문당했다고 해서 허위자백을 할 수는 없다. 또 고문을 하면 뭔가 흔적이
남게 돼 있는데 그런 흔적도 없었다"(한겨레 2013.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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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 부림사건 수사 검사
80~90년대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부림사건은 물론 삼민투위사건, 민중교육사건, 한총련사건 등 굵직한 공안사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까지도 부림사건 및 관련 변호인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라 주장(월간조선 2006년 12월호)하는 등 참여정부
당시 핍박을 받았다며 노무현의 복수라고 연설.(동영상 :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참여정부
당시 대검찰청 감찰부장, 서울남부지검장을 역임하다 현재 변호사로 재직하며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보수단체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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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구 | 부림사건 주임 판사
부림사건 주임판사중 한명으로 3차 구속된 이호철(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등에게 국가보안법
관련 무죄를 선고1했다 좌천되었고
이후 옷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시민운동에 몸담았으나 근래 엔
과거 자신의 시민운동 사실을 참회하며 보수성향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근 TV조선 등의 종편 단골 패널로 참여중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부림사건이 아닌 서울 학림사건 배석판사임) (
서석구 블로그 :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과 유서가 주는 교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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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 담당 변호인 (극중 : 송우석)
당시 부산상고라는 출신 덕분에 세무회계쪽으로 부산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변호사.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기득권층에 속했다. 실제로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씨의 (주)삼화나, 조선견직 등 부산의 대표 향토기업 상속세 등 1백억원대 이상의 사건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며 이후 송기인 신부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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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 | 당시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 (극중 : 김상필)
유신때부터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이자 부산 학생운동의 실제 자금줄이었으나 부림사건 당시 최병국의 공범 협박으로 실제 변호는 맡지 못하고 자신에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은 노무현을 추천하게 된다. 훗날 노무현과 정치입문을 함께 하는 등 협력하지만 노무현이 3당야합의 YS와 결별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김광일은 문민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2년 대선 당시엔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고 이후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기도 했다. (월간조선 2004년 4월호) 2010년 별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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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록 |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 (극중 : 이흥구)
1978년 창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재정적 도움을 주며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만든 인물 중 하나. 부산양협은 79년 '부마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당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최대 조직으로 '부림사건'의 표적이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당시 김광일을 대신해 변호인단(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의 중심에 섰었다 . 참여정부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을 지냈고 현재 변호사와 김치건강법 알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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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 82년부터 노무현 변호사와 길을 함께 한다.
경희대 총학생회
유신반대 학생시위를 이끌었던 그는 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수료하였으나 유신시위
경력으로 판사임용에서 떨어진다. 이후
부산에서 개업 준비중 사법고시 동기인 박정규(전 참여정부 민정수석)로부터 노무현
변호사를 소개 받는다. 그해
노무현과 법무법인 '부산'을 개업한 뒤 평생을 동지로 함께 한다. 2009년 부림사건 재심의 변호를 맡았으며 최근 부림사건
변호 사실을 구실로 여권에서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하자 81년 당시의 부림사건은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수료 이전사건이므로 재판과 무관하다고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가 증언한 바 있다. ( 미디어오늘 2013.11.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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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의 피해자들 |
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7월4일~8월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설동일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현 노무현재단 근무), 송병곤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재직,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권양숙 여사의 고종사촌 동생과 결혼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주례를 서줌, 영화속 진우의 실제모델)
노재열 (24세,
부산대 공대 4년휴학 : 79년 부마항쟁 주도, 이후 민노총 간부 역임),
고호석
(26세, 부산대
문리대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교사 : 현 부산 거성중학교 영어교사 재직중)
이상록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97년 사망) *부산일보 2013.03.07 기사에서 고호석씨의 증언 (그러나 본 포스트 덧글의 부림사건 피해자 가족께서
제보하신 내용은 "정신병과는 무관한 사고로 2006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송세경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아우성 구성애씨의 남편, 이후 김광일 변호사 사무장으로 활동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김희욱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 부산환경연합 대표 재직 후 귀농)
이상경
(부산대 문리대
1년퇴학 : 현재 출판업 종사) |
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9월11일~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장상훈 (24세, 부산대 약대졸 : 이후 노무현이 39세의 나이로 장상훈의 결혼식에 첫 주례를 선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공안검사 출신 한나라당 김기춘(현 청와대 비서실장)과 거제에서 맞붙었으나 패한다) 김재규
(33세, 부산대
상대졸, 당시 탁구장 운영 : 이후 노무현 후보 국민참여운동본부 부산본부장 및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이진걸 (23세,
부산대 : 79년 부산대 내에 '민주선언문'을 뿌려 부마항쟁 주도. 현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공동대표)
박욱영 (25세,
부산공전졸 : 현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의원)
윤연희 (24세, 부산대
사범대졸, 교사 : 현 부산 장림여중 음악교사) 최준영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 현재 무역업 종사)
주정민
(24세,
부산대 법대졸), 전중근
(25세,
공장근무) |
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도피중 체포) 이호철 (24세, 부산대졸 : 부마항쟁 주도,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설경혜
(23세, 교사 :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정귀순
(22세, 부산대졸 :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김진모 (부산대 4년), 최병철 (부산대 4년), 유장현 (부산대 4년), 김영
(23, 부산대, 당시
탈영군인 - 소설집 '완전한 만남'의 김하기 작가) |
( 부산지방검찰청 공소장 1981.10.2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구속자 석방요구 청원서 , 각종 신문기사 참조)
그 무렵 김형기, 송세경 , 최준영 , 김희욱 , 소준열, 설동일 등 서울 지역으로부터 저마다의 각자 사정에 따라 부산에 오게 된 몇몇 운동권 출신 인자들이 중부교회나 양서조합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과 지도력을 부산의 운동세력에게 제공, 접맥시킴으로써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송세경, 설동일 등은 서울지역에서 흔히 학습하고 있던 스터디 커리큘럼을 도입하여 양서조합내 학습단에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학내에서의 조직 확산을 꾀하는 데 실질적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송세경, 설동일 등과 당시 학습에 함께 참여하였던 이상록 , 고호석 , 이호철 , 노재열 , 송병곤 , 윤연희 , 주정미 , 설경혜 등은 그들이 80년대 초 '부림사건'에 그대로 연루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세력의 중요한 일각을 담당할 만큼 성장해 가게 된다.
그러한 노력들의 결과, '78년 말 쯤에는 부산대학 내에 저항적 학생운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분명한 학내 지하 써클이 태동하고 이를 토대로 '79년 봄 쯤에는 각 학년별 조직체계와 그 후의 재생산구조까지 갖춘 비공개 운동조직(이른바 패밀리 구조)이 생겨나게 된다. 즉 이상록(74학번), 고호석(76학번), 등이 이호철, 노재열 등의 77 학번과 김진모, 최병철, 정귀순 ,유장현 , 유동현, 김영 (현재소설가 김하기), 남경희 등 78학번을 규합하고, 정귀순, 이정애, 부경란, 최민성, 김정현, 손동준 등 79학번 신입 생들까지 조직화시켜 냄으로써 학번간의 재생산 라인이 구축된 조직체계가 상당수의 인원을 포괄하며 확립되게 된 것이다. 이 것이 일면 '도깨비 집'혹은 '사랑 공화국'으로 불리우며 후일 '80년대 초 '부림사건'을 계기로 세간에 알려진 부산대 지하 써클의 실체였다 . '도깨비 집'의 경우 명확한 실체는 보이지 않으나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 음을 감지한 바깥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사랑 공화국'은 79년초 술자리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오고 간 제의가 이후에도 조직의 이름 처럼 계속 통용되어 버린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 부산 민주운동사 - 제3절 부마민주항쟁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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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주요 피해자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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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록 (당시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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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경 (당시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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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욱 (당시 32세, 대연여중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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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당시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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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에 대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 |
노무현의 '운명이다', '여보 나좀 도와줘' 중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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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당시 행해졌던 고문들 |
속칭 '수도공사'라고 불리던 물고문은 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칠성판 위에 누운채로 얼굴에 수건을 씌운채 겨자를 섞은 물을 주전자로 끝도 없이 붓거나 욕조에 물을 받아 담그는 방법이 주를 이뤘다. 이후 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
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끈으로 손, 발을 묶고 손과 종아리 사이로 굵고 긴 몽둥이를 가로질러 넣고는 책상사이에 걸쳐놓고 난타하는 고문. |
전기고문은 고문을 받던 칠성판 위에 누운채 그대로 시행됐다.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 등은 전기고문으로 인해 발톱이 빠지는 고통을 받기도 했다. |
당시 피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금된 상태에서 몇날 몇일이고 반복적으로 경찰봉, 곡괭이자루 등으로 마구잡이 난타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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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부림사건 |
1982년 2월 23일 : 부림사건 관련 1심 판결 최고 징역 3~7년 선고 1~2차 구속자 16명은 81고단 7929, 8628(병합) 사건번호의 판결(재판장 조창호 판사)로 징역 3~7년이 선고되었다. (부림사건과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성 - 문재인) |
1982년 6월 26일 : 부림사건 항소심 16명(1~2차 구속자) 최고 징역 10년 구형 부산지법 제1형사항소부(재판장 안상돈 부장판사)는 26일 부림사건 1차 기소자인 이상록 피고인(26,부산)에게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하는 등 16명의 피고인(14명 구속, 2명 불구속)에게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각각 선고했다. ( 동아일보 : 1982.06.26 ) |
1982년 7월 6일 : 부림사건 3차 구속자 3명 1심 최고 징역 1년 구형 부산지법 제3형사단독 서석구 판사는 국가보안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호철 피고인에 대해 "정부시책을 비판했다고 하여 이를 확대 해석, 국가보안법으로 다룰 수는 없다"고 판시, 계엄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 부분만 유죄로 적용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경향신문 : 1982.07.06) |
1982년 10월 27일 : 부림사건 상고 기각, 대법원 16명(1~2차 구속자) 원심 확정 대법원 형사부는 27일 부림사건 관련자 16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과 검찰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 등이 적용돼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집행유예 2년까지 선고된 원심형량이 그대로 확정됐다. ( 경향신문 : 1982.10.27 ) |
1983년 8월 15일 : 광복절특사로 관련자 석방 정부는 광복절 제 38주년을 즈음하여 형확정자 1천9백44명에게 특별사면, 감형, 복권, 형집행정지, 특별가석방 및 특별가퇴원의 은전을 베풀기로 결정했다고 11일 발표했다. 이 광복절특사를 통해 송세경을 비롯해 송병근, 설동일, 노재열, 김희욱, 최준영, 주정민 등 총 7명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경향신문 : 1983.08.11) |
1983년 12월 26일 : 성탄절특사로 형 집행정지 전원 석방 마지막까지 남아 옥고를 치르던 이호철을 비롯해 김재규, 이상록, 고호석은 1983년 12월 대특사때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이로써 부림사건 1~3차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 성탄절 석방 복권자 명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
1988년 12월 21일 : 부림사건 4차 구속자 '김영' 마지막으로 석방 지난 21일 이른바 '부림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김영(당시, 부산대 재학, 징역10년)씨가 7년 2개월 만에 석방됨으로써 외견상 부림사건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 관련자 대부분은 한결같이 "부림사건은 끝난게 아니고 이제 시작"이라면서... ( 한겨레 : 1988.12.25 ) |
2003년 9월 18일 : 부산지방법원 '부림사건' 재심 결정 부산지법 형사1부(재판장 권오봉 부장판사)는 18일 80년대초 군사정권의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의 하나인 '부림사건'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아무개(42·여)씨 등 2명이 1999년에 낸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을 받아들여 재심하기로 결정했다. ( 한겨레 : 2003.09.18 ) |
2009년 8월 14일 : 계엄법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 일부 무죄 선고 부산지법 형사항소3부(홍성주 부장판사)는 14일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3~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김재규(61.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씨 등 재심청구인 7명에 대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법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 법 개정에 따라 면소 판결했다.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집행유예 2년~징역 1년6개월과 함께 자격정지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 연합뉴스 2009.08.14 ) |
2011년 4월 5일 : 부림사건 당시 고문, 폭행,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 고소 5.18 민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한 용공(容共) 조작사건 가운데 하나인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당시 고문, 폭행 등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들을 사건발생 30년만에 고소해 결과가 주목된다. 고호석 전 전교조 부산지부장 등 부림사건 피해자 14명은 5일 오전 부산지검에 불법으로 체포, 감금, 폭행한 전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장 이모씨 등 경찰관 2명을 불법감금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당초 경찰관 3명을 고소할 계획이었으나 최근 숨진 것으로 확인된 1명은 제외했다. ( 연합뉴스 2011.04,05 ) |
2013년 3월 6일 : 부산지법 '신군부 용공조작 부림사건 혐의 전체'에 대한 재심 결정 부산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한영표)는 고호석씨(57) 등 5명이 제기한 부림사건 재심 청구에 대해 "재심 대상 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부분에 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 경향신문 : 2013.03.06 ) |
부림사건에서 문제되었던 불온서적들!! |
*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과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부림사건 당시 그들이 읽었던 서적들을 정리했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 저자 : 리영희 (1974) 현대사와 국제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고전적 사회계몽서로서, 1977년에 출판된 저자의 또다른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한때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유신체제시절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혔다. 1999년 서평전문지 《출판저널》에 의해 '20세기 한국고전'으로 선정되었다. ( 두산백과 )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저자 : 조세희 주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조세희의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8년 6월 5일에 책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위키백과 ) |
'우상과 이성' / 저자 : 리영희 (1977) 리영희저작집 제2권 <우상과 이성>. 현대 중국에 관한 몇 편의 논문, 종합잡지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발표했던 논문, 평론, 에세이 및 수필에 새롭게 몇 편을 보태어 엮은 책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을 이룬다. 행동하는 지식인 리영희의 저작들을 한자리에 정리한 책. ( 인터넷교보문고 ) |
'역사란 무엇인가' / 저자 : 에드워드 카 영국의 대표적 역사가 E. H. 카의 역사 입문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라는 근본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역사 철학서로, E. H. 카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속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E. H. 카의 오랜 역사적 연구 및 서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의 결정을 담고 있다. 역사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역사 인식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저자 : 슘페터 조지프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창조적 파괴 개념을 서술하였다. 초판은 1942년에 발행되었으며, 2판은 2차대전 이후인 1947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귀결'을 덧붙여 출간되었고, 2년 후에 '전후 전개에의 주석'을 덧붙인 제3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경제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과 달리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태적 모형분석이 아닌, 역동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려냈다. ( 위키백과 ) |
'경제사관의 제문제' / 저자 : 셀리그만 (1979) 사회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진보의 조건이 되는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본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에 관해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접근한 책으로서, 경제사관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입문서. |
'제3세계의 이해' / 저자 : 사무엘 팔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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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경제론' / 저자 : 박현채 (1978) 우리의 경제현실과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열정적 참여를 주장하는 이 비평속에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경제의 논리와 자립적 민족경제에 대한 전망이 논리적으로 펼쳐진다. |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 / 저자 : 유인호 (1978) 비판경제학의 골자들을 추려담은 책. 71년부터 73년까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에 실렸던 경제평론들을 책으로 묶었다. '경제성장의 허와 실'등 이 책에 실린 다섯편의 글들은 책의 제목이 정확히 지시하듯 10년간 성장경제의 뒷면, 그 만만치 않은 반대급부에 주목했다. |
'제3세계와 종속이론' / 저자 : 염홍철 (1980) '종속이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A.G.프랑크'를 비롯해 'I.월러스타인', '샤미르아민'등 종속이론의 주도적 이론가들의 논문을 실은 책. 종속이론은 심각한 대미무역적자, 막대한 대미 외채, 저개발경제의 악순환을 겪고 있던 40~50년대 남미를 해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4년 유엔 남미경제위원회(ECLA)의 보고서는 종속이론의 태동에 중요한 문건이 되었다. |
'해방 전후사의 인식' / 저자 : 송건호, 백기완 외 다수 (1979) 첫 권이 1979년 10월에 출간됐으며, 이후 10년에 걸쳐 전6권으로 완결됐다. 지금까지 모두 50여만부가 판매되었을 만큼 '명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근현대사 분야 논문을 쓸 때 자주 참고서적으로 활용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발간 겨우 11일만인 79년 10.26 사건으로 판금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해금되었다. 하지만 그해 5.17 군사 쿠데타 이후 저자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조사받았으며 대학으로부터 쫓겨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하지만 판금에도 불구하고 80년대 군부독재정권시기 큰 인기를 얻었다. ( 엔하위키 ) |
그 밖의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서적으로는 경제학(이영협 저), 서양경제사론(최종식 저), 한국현대사론(송건호 저), 분단시대의 역사 인식(강만길 저), 민중과 경제(박현채 저), 전후 30년의 세계경제사조, 한국농업문제의 인식(공저), 교육과 의식화(파울로 프레이리), 현대의 휴머니즘(무타이 리사쿠 저), 자본주의의 어제와 오늘(모리스 돕 저), 인간의 재산(레오 휴버만 저), 스위지 경제학(폴 엠 스위지 저), 자본주의 발달이론, 경제 계획의 실제(베들레헴 저), 대중 조직의 이론과 역사(미우라 쓰도무 저), 자본주의 경제와 구조(일본 세무 경리 협회간) 등이 있었다. (문재인 - 부림사건과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성) |
부림사건 수사 검사 고영주 변호사 최근 인터뷰 (2013.12.13) |
New Daily |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사건" (기사 본문 보기) "공산주의 세상 되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기사 본문 보기) 고영주 변호사 "부림사건은 절대 용공조작사건 아니다!" "그들은 절대 허위자백한 게 아닙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말했어요" |
본 블로거의 기사 반박 |
부림사건과 영화 '변호인'에 대해 비판적 내용을 다루는 글들에는 주요 증거자료로 당시 검사 '고영주 변호사'의 증언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최근까지 부림사건 등의 용공조작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는 월간조선 2006년 12월호에 '공안검찰의 대부'로 소개되며 인터뷰를 하는데 당시 "부림사건 관련자들은 명백한 공산주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조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는 '검사가 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당신은 역사의 발전법칙도 모르느냐?'면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당신은 심판을 받게 될것이다'라고 하더군요"라고 발언했습니다.
지금껏 알려진 바로는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엄청난 고문을 받으며 읽지 않은 책도 읽게 만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생각하게 만들며,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게 만들어 허위 진술을 하게 했고 그 허위 진술을 근거로 법정에서 유죄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사건이 부림사건인데 왜 저토록 중요한 진술이 공소장에 포함되지 않았느냐 하는게 궁금합니다. 실제 저런 진술이 존재했다면 왜 당시 공안검찰은 피의자 진술내용으로 공소장에 추가하지 않았을까요? 위 내용과는 별도로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2013.01.04)'에서 보면 "부림사건 당시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다. 변호사가 자신이 변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몰랐을 수가 없으므로 문재인도 공산주의자고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대한민국이 적화되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문재인은 당시 부림사건 변호인 명단에 포함되지도 법정에 나선 적도 없습니다. 고영주는 이후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 후보가 부림사건의 변호인이었다고 발언을 합니다. (주간조선 2013.09.09)
당시 공소장에도 없던 피의자 진술내용이 15년이나 지나서 생각이 났을리도 없고 부림사건 담당 검사였던 사람이 당시 변호인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의 최근 진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게 사실입니다. 고영주의 수차례 발언에 대해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였던 고호석씨의 최근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미디어오늘 - 영화 '변호인' 배경 부림사건까지 '난도질' : 2013.11.20) "대공분실에서 구속영장 청구해 유치장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소리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협박해 고도로 위축된 상태였고 유치장에서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런 정신 상태에서 검사를 위협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경찰 조서와 검찰 조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검찰에 유리한 진술인데, 그럼 진술을 적은 조서를 공개하면 되는 일 아니냐" "부림사건은 81년도에 일어났고 문재인 의원은 82년에 막 부산지역 변호사로 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사건의 변호인 명단에 문재인 의원은 없었고, 단 한번도 법정에 나온 적이 없는데 이를 알고 있는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완전한 왜곡, 날조" 마지막으로 송병곤씨의 회고문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시사인 2013.12.09) 중 일부를 소개하며 끝맺음합니다.
"나와 당신이 겪었던 부림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유공자로까지 인정받았던 우리를 용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부림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다시 차오를 무렵 당신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의 억울함을 잘 대변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깁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 |
http://inizios.blog.me/10180800260
1985 김근태 고문사건 (민추위사건,민청련사건)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김근태는 의경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 2년여 동안 그는 집회가 끝난 뒤엔 늘 유언비어 유포 등의 어처구니 없는 혐의로 즉심에 넘겨지곤 했다. 그는 이번에도 민청련 총회와 관련해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는데, 이날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홀가분하게 유치장을 나섰다. 앞선 민청련 총회에서 의장직은 다른 사람이 맡기로 이미 결정된 터였다.
수사과를 지나 막 복도로 나서는 순간, 7명의 정사복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일순 스산한 한기가 전신을 덮쳤다. 마당에 나서니 시동을 켠 포니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다.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이곳 515호실에서 그 ‘짐승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가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고문자들은 김근태에게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고문용으로 제작된 칠성판 위에 내팽개쳐졌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고문의 강도를 계속 높여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들어 김근태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처음 사흘동안 그는 한 숨의 잠도, 한 숟갈의 밥도 제공받지 못했다. 사흘이 지나면서부터 고문은 더욱 포악해지고 격렬해졌다. 그는 제2의 광주사태가 진행되고 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국도 투쟁 과정에서 일정하게 존재를 인정해주던 민청련 의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일곱번째의 고문이 진행되던 중 김근태는 마침내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혐의사실을 시인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자주 만났다는 등등.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그는 제발 고통 없이 죽여 줄 것을 애원했다. 고문자들은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테니 살려달라고 하는데 너는 죽여달라고? 그래, 끝까지 반항하는 놈 깨끗이 죽여주마.”
고문자들은 포획한 먹이감을 들여다보고 시시덕거리는 승냥이들이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김근태는 9월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9월20일 마지막 고문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관순·윤동주나 광주의 영령들처럼. 그는 처참한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혼자 신음해야 했다. 기댈 언덕도, 부여잡을 풀포기도 하나 없는 황야에 버려진 것이다. 그곳은 바깥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아수라 지옥이었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는 아내 인재근을 만났다. 만남의 시간은 찰나였다.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발과 발꿈치에 난 찢긴 상처, 시꺼먼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인재근은 미처 경악하고 분노할 틈도 없었다. 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모두 담아두었다.
사실 둘은 70년대 이후 줄곧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 사이였다. 남편이 구류 마지막날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라진 뒤 행방이 묘연하자 인재근은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재근은 수사기관이란 기관을 다 찾아다녔지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졌다(한참 지난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다). 인재근은 김근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여러날째 잠복하고 있다가 이날 남편을 만난 것이다.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모두 경악했다. 그러나 그때도 모든 국내 언론은 침묵했다.
김근태는 서대문구치소 병사에 수용됐으나 변호사 접견은 물론 가족 면회도 할 수 없었다. 이돈명·홍성우·황인철 등이 변호인 접견을 신청하면 어김없이 검찰이 김근태를 불러갔다. 1차 공판 1주일 전인 12월12일에야 처음으로 공식 접견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
이‘짐승의 시간’이 만들어낸 소설같은 이야기 중 하나는 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변호인들은 12월30일 후일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진 ‘김전무’(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부르는 가명)를 비롯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8명을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검찰을 향해 대한변협은 86년 8월6일 회장 김은호의 명의로 조속한 사건 처리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나 검찰은 고발내용에 대해 무혐의 처분하는 후안무치한 결정을 내렸다.
김근태 고문사건은 그동안 아무런 연결통로 없이 각자 반독재투쟁을 벌이던 재야와 야당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 즈음 개헌투쟁의 방향과 방법을 두고 야당과 재야는 대여협상론과 전면투쟁론으로 심각한 이견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김근태. 그는 1947년 경기 부천에서 출생해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78년부터 5년여간 생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가장 평범하고 낮은 곳에서 일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상담역이 그의 직업이었다. 재학중에 유신 장기집권 반대운동을 했지만 잡히지 않고 7년 동안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 민주화운동 동료들의 공소장에는 항시 ‘공소외 김근태’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 그의 별명은 한동안 ‘공소외’였다. 또한 너무 진지해서 ‘김진지’라고도 불린다.
군사정권 하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고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이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온 것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잔혹한 고문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문 내용을 기록하다시피 머릿속 깊이 담아낸 김근태 자신의 집요함, 이를 외부세계에 정확하게 전파한 아내 인재근의 민첩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2004.05.30
1989년 노태우 정권 때
홍성담 간첩 조작 사건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요약] 1991년 당시 명지대생 강경대 씨의 사망에 항의하면서 분신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기훈 씨가 대필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복역했던 사건이다. 강기훈 씨는 2015년 5월 재심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당시 19세)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항의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 씨(당시 25세)가 5월 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는 등 대학생들이 차례로 분신한다. 검찰은 김 씨의 유서와 가족이 제출한 필적이 다르다는 내용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김 씨의 동료였던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구속 기소하기에 이른다. 법원은 1992년 7월 강 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으며, 강 씨는 복역 후 1994년 8월에 만기 출소하였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관련, 사건 초기부터 조작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과 법원은 '유서의 필적은 숨진 김 씨가 아닌 강 씨의 것'이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를 근거로 강 씨의 유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강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고 결론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김 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국과수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유서의 필적은 김 씨 본인의 것이라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며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고, 강 씨는 이듬해 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2009년 9월 김 씨의 유서를 대필하였다는 수사와 재판 결과는 잘못되었다며 강 씨가 낸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사건을 다시 심리하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서울고검 공판부(검찰)는 2009년 9월 법원의 결정에 대해 재항고(즉시항고)했고, 대법원에서 18년 만에 재판을 다시 진행할지 여부를 최종 심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3년이 지나도록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결정을 미뤄오던 중, 2012년 10월 19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2012년 12월 20일 재심이 이뤄진 후, 2013년 10월 10일 재심 과정에서 전대협 노트와 김기설 씨의 평소 글씨에 대한 감정이 국과수에 의뢰되었고, 국과수는 두 달 뒤인 12월 11일 김기설 씨의 필적이 맞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2014년 2월 13일 서울고법은 1991년 제시된 국과수의 감정 결과는 신빙성이 없다는 판단하에 강 씨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하지만 2월 19일 검찰이 서울고법에 상고장을 제출함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은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김기설 씨 유서대필 사건으로 구속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한 강기훈(51)씨에 대한 재심에서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는 1992년 당시 대법원이 유죄 확정 판결을 내린 지 23년 만이다.
한편, 강기훈 씨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894년 프랑스 군부가 가짜 필적을 증거로 유대인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를 간첩으로 몰아 종신형을 선고했던 사건에 비유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당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이 선고되자 작가 에밀 졸라 등 지식인들의 거센 비난이 이어졌고, 드레퓌스는 189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2년 만인 1906년에는 최고 법원의 판결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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